초대 하나님의교회가 지키던 유월절 폐지의 역사적 배경-1탄
하나님의교회가 지키는 새언약유월절의 폐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성경의 상식을 넓혀보자.
니케아 회의와 아리우스 주의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며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우스의 주장
하나님의교회 규례 유월절 폐지는 니케아 회의 때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아리우스의 생각은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형식에 넣어 펴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렸고 어부들까지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동방 각지로 여행하던 아리우스는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몇 명의 교직자들 때문에 문제는 더욱 확산되었다.
사도시대 이후로 여태까지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분이 아리우스에 의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나갔다.
주후 325년,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초대 하나님의교회의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교회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일체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296-373)이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그는 20대에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논쟁이 끝날 때까지 수십 년간 관여하였으니 가히 아리우스 논쟁에 대한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20대였을 때 아리우스는 이미 60대였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감독에게 여기서 작성한 신조(니케아 신조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두 명의 감독(리비아의 데오나스와 세쿤더스)과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하였다.
2년 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의 교리를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아리우스를 앞장서서 공격했던 감독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거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집요하게 덤벼드는 적들에 의해 336년에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반대파를 제거한 아리우스 파들의 다음 단계는 니케아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인 주후 336년 아리우스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으므로 형세가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공론화 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제 드러내놓고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유배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견해였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 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를 지지한 것이다.
자신의 지배 영역 안에 들어온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서방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얼마 후 콘스탄틴 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의 지지자로 니케아 교리를 반대한 사람이었으니 아리우스파의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리가 작성되었다. 당시 감독들은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황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전에 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세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이렇게 새언약 유월절이 폐지되기까지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이 역사적 배경을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규례의 중요성에 대해서 올바로 알지 못하게 된다.
초대 하나님의교회가 지키던 유월절 폐지의 역사적 배경-1탄에 이어서 2탄에서 정확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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